필자는 지난해 12월 한 폐암 환자로부터 산재를 신청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약 30년간 자동차 도장공으로 일했지만 4대 보험 가입 이력도, 국세청 소득신고 기록도 거의 없었다. 카센터나 세차장 한 켠을 불법으로 임대받아 운영되던 도장작업장들을 전전하며 일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남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한 산재 인정의 간절함과 자신이 불법적인 사업장에서 근무하였음을 이유로 한 우려가 동시에 묻어났다.
스프레이 도장공과 폐암과의 업무상 상관관계
도장 작업시 발생하는 벤젠, 크롬 화합물 등은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1군 발암물질이다. 근로복지공단 역시 10년 이상 도장 작업에 종사하면서 발암물질에 노출된 노동자의 폐암에 대해 업무기인성을 강하게 인정하는 추세다. 도장업무에 활용되는 유성페인트에는 수천 종의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고, 업무 과정에서 갖는 강한 분사력으로 인해 스프레이를 활용한 도장공과 폐암과의 업무상 인과관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근무이력 증빙의 중요성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는 업무상 질병 인정을 위해 '업무수행성'을 요구한다. 여기서 핵심은 근무이력의 증빙이다. 도장공의 직무가 폐암과의 상당인과관계가 강하게 인정되는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도장공의 직무를 오랫동안 성실히 하였음이 인정될 때의 이야기다. 따라서 산재 신청을 위해서는 반드시 근무이력이 증빙되어야 한다.
근무이력 증빙이 어려운 경우
근무이력 증빙에 관해서는 4대 보험 가입이력, 근로소득 원천징수영수증, 급여통장 내역이 기본 증빙자료가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영세 자동차 정비업계의 현실은 다르다. 특히 19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는 도장작업장 상당수가 미신고 상태로 운영되었고, 일당제 현금 지급이 관행이었다. 재해자도 총 근무기간 중 상당수를 미신고 사업장에서 근무하였고, 세금처리를 하지 않는 곳이었던 만큼 재해자 역시 급여를 현금으로 지급받았을 뿐 해당 급여를 국세청에 신고하거나 4대 보험 직장가입자로 가입한 이력은 현저히 적었다.
필자가 담당한 사건에서도 재해자는 군 복무 시절 배운 도장 기술로 제대 후 줄곧 이 일만 해왔지만 공식 기록은 거의 없었다. 이런 경우 근로복지공단 실무에서 인정하는 '사실확인서'와 참고인 진술서, 가족구성원의 소득금액확인자료가 돌파구가 된다. 동료 노동자 2인 이상의 진술서, 거래업체 확인서, 가족의 진술서 등을 통해 근무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필자는 재해자가 4인 가족의 생계를 홀로 책임지며 소득활동을 했고, 배우자는 마땅한 소득이 없었던 점, 30년간 한 직종에만 종사했다는 점, 동일 작업장에서 일했던 동료 5명 이상의 구체적 진술, 과거 작업장에서 찍은 사진 등을 토대로 근무이력을 증빙하였다.
근무이력이 없다고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
근무이력을 증빙하는 공식 문서는 4대 보험 가입내역, 국세청 소득신고 내역 등이다. 이는 공단, 은행 등에서 일관되게 요구하는 자료이나 안타깝게도 재해자와 같이 근무하는 사업장 자체가 불법영업의 소지가 있는 경우 근무이력 증빙이 어렵다. 그러나 산재는 재해자가 정상적인 사업장에서 근무하였는지, 불법적인 사업장에서 근무하였는지를 따지지 않는다. 설령 불법적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그 책임이 재해자에게 없으며 노동자로 성실히 근무하였을 뿐이라면 그로 인한 재해에 대해서는 보장을 받는다. 이러한 형태의 노동은 아직도 존재한다. 음식점 같은 영세사업장은 아직도 매일매일 현찰로 급여를 정산하는 곳이 많고, 기장도 제대로 하지 않아 인건비 지출이 증빙되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권 보호는 완벽한 서류가 아닌 그들의 실제 노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근무이력 증빙이 어렵다고 포기하기 전에 전문가와 함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해 보길 권한다. 나아가 근로복지공단은 현실의 영세 노동자들에게 입증책임의 문턱은 높다는 현실을 직시하여 실질을 기반으로 관련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심사해야 한다.